• 최종편집 2024-10-07(월)
 

한때 '인문학'이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은 서점가, 강연장, 답사모임 같은 데를 찾아보아도 아직 식지 않은듯합니다. 강의를 나가보면 개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함을 느낄 수 있는데요 마치 철학을 어렵게 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국가 발전도 학문과 연결해 볼 수 있어요. 국가 초기단계에는 법학, 정치학이 중심이 되지만, 초기발전단계로 가면 경제, 사회, 신문방송 등으로 관심이 옮겨 가고, 좀 더 발전하면 철학, 심리학 등으로 축이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숙단계에는 고고학, 인류학 등이 발달하면서 제국을 꿈꾸지요.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그랬으니까요.

 

인간은 어떤 흐름 속에 존재하고 그 흐름 속에 무늬를 그리며 삽니다. 자연과 나와의 관계에도 인문의 무늬를 그려요. 인문학은 인간이 자연과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떤 무늬를 그리며 사는지를 연구합니다.

 

인문학하면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떠올립니다. 신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스스로 독립하려는 사상입니다. 신이 아닌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우월성을추구 하겠다는 것이지요.

 

모든 학()은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모방을 통해 계속 습득함이 학습인데, 학습이 학이 되는 순간 인문적 상상 · 통찰 · 창의력은 결핍되죠. 그래서 학이 아닌 활동으로 가야하고, 인문적 통찰로 나가야합니다. 인문적 통찰은 딱 보면 알아채는 힘이죠. 그 힘을 키우려면, 우리가 아닌 나로 가야하고,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인재로 이끌어야 합니다.

 

TIME 표지에 아시아인은 생각할 줄 모른다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생각하고 이를 찾기에 골몰하는 삶을 지적한 거지요. 머리에 잔뜩 뭔가를 채우고 그대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머릿속의 상을 좇거나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생각이란 동력이 약화됩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적막한 무대에 고도를 기다리는 정체모를 두 인물이 나오지요.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이 결국 고도씨는 오늘밤에 못 오지만 내일 올 예정이란 황당한 결말로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죠. 이 둘이 기다린 고도는 무엇일까. 종교적 구원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종전 소식?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작품의 난해함을 말하면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건 인생의 비애 속에서도 잃지 않은 유머 때문입니다. 한 열광적인 독자가 그에게 말합니다. “전 일생 동안 선생의 열렬한 팬이었고 40년 전부터 선생님 책을 읽어왔지요베케트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그 참 피곤하시겠소.”

 

인문학자들이 한국사회를 위기로 보는 건 선진사회로 가는 경계에 머물러서입니다. 선진 학습으로 양적 성장에 성공했으나, 새로운 방향으로 경제, 정치,교육의 돌파구를 마련 못해 지금의 불행을 겪는다고요. 한국사회의 발전은인문적 통찰로 질적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합니다. 이를 알고도 못나가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기업인만이 인문적 통찰에 힘씁니다. 그렇게 나가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기업인이 인문학을 필요로 함은 고급스러워지려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틀과 방식을 혁신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입니다. 인문적 창의성은 용기와도 관련 있어요. 변화의 경계에 선 모호함, 불안함을 견뎌야하니까요.

 

이를 잘 설명한 사람이 2500년 전 노자(老子)입니다. 우주만물에 대해 생각한 중국 최초의 철학자지요. 그가 찾은 우주의 진리를 도()라 하고, 우주만물이 이뤄지는 근본적 이치를 도()로 설명합니다. 노자는 인문적 개인이 자발적으로 모인 사회가 강하다고 했습니다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태그
첨부파일 다운로드
이-3.jpg (7.8K)
다운로드

전체댓글 0

  • 40153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인문학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