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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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제하는 삶을 위하여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온다' 했고, 동양선비들도 인간의 덕목중 절제만 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절제는 한 마디로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은 알아도 실천에서 어려움을 겪지요. 누구나 경험했을 일입니다. “새해는 꼭 해야지.” 다이어트, 금주, 금연 등 야심찬 결단을 하지만 얼마 안가 흐지부지 되죠. 습관 된 행동을 멈추고 나쁜 버릇을 고치는 일은 왜 늘 힘들까... 모순 속에 길을 찾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습관도 그중 하나죠.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적어도 만 번 이상의 훈련이 필요한데, 나쁜 습관은 한두 번으로도 족하다”고 해요. 손대면 헤어나기 어려운 도박과 같은 거죠. 지나친 걱정도 고약한 습관입니다. 걱정은 몸 안에서 번지는 불이죠. 밖에서 난 불은 소화기로 끄면 되지만 안에서 쥐고 흔드니 대처가 어려워요. 근심은 할수록 빠지는 늪입니다. 가려울 때 긁는 것처럼 당장은 잦아들지만 곧 더 가려워 집니다. 오죽하면 티베트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다”는 속담이 생겼을까요. 인간이 절제를 못하는 데는 진화론,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많은 요인이 혼재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란 말도 있어요.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과식본능이, 불필요한 물건을 계속 사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구매심리가, 알면서 계속 말실수를 함은 말로 관심을 끌려는 인간의 습성에 있답니다. 그렇다고 인간사회가 절제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요.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장식에서 벗어난 절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요. 샤넬의 패션은 여성에게서 허위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게 한 사고를 쳤지요. 절제는 언어는 물론 모든 생활에서 새로운 품격을 담아냅니다. 절제를 막는 것은 당장의 만족과 즐거움이 ‘참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게 유혹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스스로 욕망 조절을 못하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유익한 것, 해로운 것을 구분해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이끌어 주니까요. 사실 마음에서 분출되는 대부분은 절제의 대상입니다. 욕심과 허영, 미움, 시기, 질투까지도.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우유를 내고 뱀은 독을 내는 이치와 같아요. 사람이 입으로 먹을 때는 독이 없는데, 그것을 먹고 나오는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관계가 어질기를 원한다면, 절제의 힘에 도움을 청하세요. 절제는 좋은 습관을 부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는 데는 인류가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있어서죠.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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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좋은 생명체로 산다는 것
    반려동물 1000만 시대. 어딜 가도 동물과 만납니다. 사람들은 개에게 어떤 운동을 시켜야 할지, 고양이는 어떤 장난감을 주면 좋을까를 놓고 고민합니다. 사람이 동물에게 무엇을 배우고, 동물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걱정하는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가을볕이 좋아 공원 벤치에 앉았는데 주인을 따라 산책을 나온 시추 한 마리가 내 쪽으로 다가옵니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쓰다듬어주니 무릎까지 올라와 얼굴을 핥고 난리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좋았을 것을, 다음이 문제였죠. 시추를 데리고 가던 주인이 면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너 똥개야? 아무나 꼬리치면 어떡해?” 순간 무안해진 건 나였지요. 사람들은 애완견을 엄마, 아빠하며 끼고 살지만 실상 생명체를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와는 별개로 보입니다. 한 주인을 좇아야 혈통 있는 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위협적인 개를 은근히 자랑하기도 합니다. 심심찮게 애완견 때문에 다툼이 생깁니다. 왜 우리 쁘니만 야단치세요. 개라고 하셨는데 그럼 개조심 하시면 안 되나요?“ 듣자하니 내 새끼를 개라고 폄하한 댁이 비켜서 가라는 말로 들립니다. 개를 놓고 싸운다는 게 볼썽사나운지 됐다며 자리를 피하네요. 해외에서는 이런 개를 사회성이 부족한 문제 견으로 봅니다. 낯선 사람이라고 다 도둑은 아니니까요. 명견 진돗개가 세계애견협회에 정식 품종으로 등재되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 주인에만 충성도가 강해서죠. 진돗개가 군견으로 적합하지 못한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인이 자주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거지요. 사람도 어린 시절의 경험과 교육이 평생에 작용하듯 개의 사회성도 생후 3-12주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때 다양한 환경과 사람을 접하지 못하면 훗날 낯선 사람이나 상황 앞에 쉽게 겁을 먹고 짖거나 공격성을 띈다고 해요. 최근 야생동물이 잇단 변을 당하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습니다. 주택가에 나타난 맷돼지가 사살, 포획, 도주하는 소동을 벌이더니, 다음날 밤은 고속도로를 걷던 맷돼지 10마리가 모두 차에 쳐 죽었습니다. 이들은 왜 나타났을까요? 지난 주, 서초구 서리풀공원에 올랐다가 여기저기 토끼가 뛰노는 진 풍경과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봐도 경계하지 않는 걸 보면 이러한 환경에 익숙해져 보입니다. 그러다 서초구청이 내건 안내문을 읽고서 사연을 알았지요. ‘제발 토끼를 버리지 마세요” 일종의 호소문입니다. 애완동물 1000만 시대의 그늘입니다. 언제라도 싫증나면 버려지는 개, 고양이, 열대어, 토끼 등. 곳곳에 버려진 생명들의 신음에는 무관심합니다. 곧 겨울이 올 텐데 토끼는 모진 추위를 어떻게 견딜까? 그러면서 엉뚱한 생각이 도집니다. 이판에 전쟁이 난다면 거리마다 버려진 애완동물로 홍수가 나겠구나. 유전자 관점에서 보면 모든 생물은 연결돼 있습니다. 서로 돕고 공생해야 그나마 생태계가 유지될 텐데, 지금 인간이 자행하는 이 어마한 환경파괴, 생명파괴는 궁극에 내 가족을 사지로 모는 일입니다. 생명체 최상부 고리의 사람이라면, 이제라도 좋은 생명체로 살아야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앞으로 처음 본 개가 꼬리를 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잘 키우셨네요. 교육이 훌륭하신가 봐요.” 이렇게 칭찬하면 어떨까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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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 나의 무서운 상전이 된 몸
    어디선가 보았던 글입니다. “젊었을 때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한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 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 젊어서야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준 몸인데, 지금은 몸이 내 생명줄을 바싹 쥐고 있습니다. 몸이 상전이 된 데는 세월 탓이 여덟이고, 나머지는 몸을 마구 굴린 내 잘못입니다. 우리나라 기대수명은 82.6세로 일본에 불과 1.5년 차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건강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10명당 3명꼴에 불과합니다. 그 대신 외래진료건수는 세계 최고지요. 우리처럼 종합건강검진이 번창한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덕분에 병을 조기에 발견도 하지만 건강에 대한 걱정을 과잉생산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수년 전 파이낸셜 타임스가 한국인의 장수비결을 ‘김치와 건강 염려’라고 빗대고는 마음 편히 사는 것보다 좋은 건강비결이 있겠느냐고 되묻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의학정보의 홍수 속에 삽니다. 웬만큼 나이가 든 사람은 만나면 건강문제가 대화의 중심이 되는 현실입니다. 하버드의대 연구팀이 60년에 걸쳐 3백명을 대상으로 ‘잘 늙기’를 추적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노화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와 원만한 인간관계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해 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눈이 어둡고 몸이 굳어 발톱 깎는 일조차 전쟁이라며 씁쓸해 하지만, 생로병사를 순리로 받아들임이 첫 번째 건강의 비결입니다. '나무는 뿌리가 먼저 늙고, 사람은 다리부터 쇠한다’ 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대뇌에서 다리로 보내는 명령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고, 속도도 떨어집니다. 진시황 이후 청나라 마지막 황제까지 335명 황제의 평균수명이 41세이고, 조선시대 27명 왕의 평균은 37세에 그칩니다. 그래서 예부터 장수의 조건으로 보약이나 산해진미보다 튼튼한 다리를 꼽았지요. 다리는 기계의 엔진 같아 망가지면 올 스톱입니다.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피부가 주글주글해짐을 걱정할 게 아니라, 다리 근육부터 신경 쓰랍니다. 몸에서 가장 큰 관절과 뼈는 다리에 다 모여 있어요. 젊은이의 대퇴골은 승용차 한 대 무게를 견뎌내고 슬개골은 몸무게의 9배를 지탱합니다. 대퇴부와 종아리 근육은 땅의 인력과 맞서느라 늘 긴장상태에 있고요. 견실한 골격과 강인한 근육, 부드럽고 매끄러운 관절은 인체의 철의 삼각을 만들어 하중을 지탱합니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prevention(예방)’ 지가 장수의 특징으로 다리근육의 힘을 꼽는 이유입니다. 얼굴에는 그 사람의 일생이 담겨 있습니다. 화장을 해도 숨은 얼굴에서 나오는 잔상은 가릴 수 없지요. 젊어 사랑했던 여인을 만나고 온 친구가 만나지 않음만 못하다고 쓸쓸해 합니다. 고이 간직해온 환상이 무너져 아쉽다면서. 나이가 들어도 여자의 얼굴에서 젊은 시절의 모습이 보여야 아름답고, 남자는 경륜과 인품이 풍겨나야 잘 늙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는 어떤 생각과 태도로 삶을 살았느냐, 살아갈 것이냐 와도 통합니다. 철따라 옷을 갈아입듯, 노화에 순응하고 원만한 인간관계와 다리 근육까지 잃지 않으면 상전이 된 몸과 더없이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겠지요. 금이라서 다 반짝이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스스로 생각과 태도를 잘 가꾸면 녹이 내리지 않고, 나이테만큼 깊게 내린 뿌리에는 쉽게 서리가 닿지 못하니까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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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7
  • 삶은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
    70대에 읽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젊어서 읽던 때와는 또 다른 잔잔한 공명을 주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오디세이아’의 테마는 ‘귀향’. 그리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고향을 찾아가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귀향 과정을 이야기한 대서사이다. 그 과정에서 바다와 섬, 그 밖의 여러 곳에서 고난을 겪으며 고향을 찾기까지의 분투와 아픔을 그렸다. 그의 귀향 여정은 세월이란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형극의 여정 끝에 고향을 찾는 것으로 시련이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디세우스가 살인적인 재앙을 헤치고 귀향에 성공하더라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 그동안 집안이 망해 버렸거나 아내가 정절을 버렸다면, 그의 귀향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케네 왕 아가멤논이 집에 무사히 돌아온 줄 알고 안심하다가 아내와 간부에 의해 살해를 당한 것처럼, 한 순간도 안도할 수 없는 게 인생이고 삶이기에. 오디세우스는 전쟁 영웅답게 신4중했다.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에 도착한 그는 일단 거지로 변장하고 가족들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남편 부재의 20년 세월을 아내 페넬로페는 어떤 심정으로 살았는지, 은밀하게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페넬로페의 베 짜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쉴 새 없이 일을 해도 끝나지 않는다는... 가장이 집을 비운 사이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녀는 남편 없는 긴 세월을 숱한 유혹과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의 미모에 반해 구혼을 청하는 남자들로 편할 날이 없었으니까. 오디세우스는 출정에 나서면서 아내에게 10년을 약속했다. “만일 10년 안에 돌아오지 못하면 당신은 재혼을 하시오”라고. 오디세이아에는 페넬로페 이야기처럼 흥미로운 소설적 장치가 여럿 있다. 그녀는 정숙한 여인이었다. 구혼자들이 몰려와 반협박조의 청혼을 할 때마다 이를 지혜롭게 물릴 줄 아는 여자였다. “지금 시아버지에게 바칠 옷을 짜고 있으니,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며, 에둘러 남자들을 진정시킨 것이다. 베틀에 실을 올리면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니, 욕망에 달뜬 남자인들 어쩌겠나. 낮에는 옷을 짜고 밤에는 풀고, 하루하루 같은 수고를 반복하면서 페넬로페는 오매불망 남편의 귀향을 기다렸다. 남편이 약조한 1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실타래와 베틀에 자신을 동여매고 자신의 정절을 지킨 셈이다. 오디세우스가 전편에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 귀향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그 과정이 삶이라는 것. 집에 돌아오려면 먼저 집을 떠나야 하듯 귀향은 출향이 전제돼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집을 떠난 것은 밖에서 끌어낸 힘도 있지만, 밖으로 나가려는 내면의 원심력도 작용했다. 오디세우스의 투혼은 유혹의 노래를 부르는 세이레네의 섬들을 통과할 때 잘 드러났다. 부하들은 유혹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밀랍으로 막았으나, 오디세우스는 노래는 들으면서 그 유혹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어놓았다. 인간을 바깥세상으로 끌어내려는 호기심은 위험한 것이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억누르면 자폐증이 되고, 그렇다고 생각 없이 호기심을 좇다가는 ‘파멸’을 부를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도 파멸에 이르지 않는 절묘한 선택을 배합한 셈이다. 인생은 늘 원심력과 구심력의 작용과 반작용이 상충하는 삶이다. ‘귀향’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원심력만 작용하면 인간은 결국 자아 상실의 상태로 빠지게 됨을 경고하는 것일까? 인간이 당면한 환경 문제와 물질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간이 아무리 신적 앎에 다가선다 해도 우리 자신은 신과는 다른 인간임을 재확인하는 지혜를 잃지 말라”는 경고로도 읽힌다. 오디세이아는 신화적 요소에 이야기를 버무려 고전 특유의 매력을 담아냈다. 특이한 문체,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현들이 곳곳에 매력 포인트를 숨기고 있다. 페넬로페에게 몰려오는 구혼자들 행태, 20년 정절을 지키는 페넬로페의 눈물, 오디세우스의 귀향과 상봉담(談), 그리고 아내를 넘본 자들을 응징하는 복수담까지…. 춘향전의 백미인 이도령과 춘향의 상봉 같은 극적인 장치도 멋스럽다. 숱한 남자로부터 유혹에 시달려온 페넬로페는 남편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쩍 떠본다. “그 침대를 이쪽으로 옮겨놔 주시겠어요?”라고…. 그러자 오디세우스가 답했다. “그 침대는 옮길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알지 않소?” 오디세우스가 직접 산 나무의 밑동을 잘라 만들었으므로, 땅 속에 뿌리가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진짜 남편 오디세우슥가 돌아왔음을 확증하고 감격적인 부부 상봉이 이루어진다. “드라마처럼 재밌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한 번 읽어봐. 남는 게 있을 거야.” 학창 시절, 나의 손에 오디세이아를 건네주며 일독을 권하던 선배. 그는 지금 이 세상을 떠나 본향집을 찾아가고 있다. 그길 만은 험난하지 않기를... 선배의 따뜻한 미소가 눈가에 맴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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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어머니의 강(江)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 항상 봄처럼 새로워져라.... 그때는 그 말의 속내가 무엇인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불혹이 넘어서 비로소 그 말에 눈을 떴습니다.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혼신을 다해 생명을 탈환하는 노력을 보고, 어린 자녀들에게 ‘부지런해라‘고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을 깨달으며,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고 당부했습니다. 화단의 나무에서, 연못과 들에서 움트는 대지의 새눈들이 경이로워 딸아 너도 저렇게 새로워져라고 일렀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여기 서 있는데 왔다간 건 그들입니다. 이젠 아들이 손자에게 같은 말을 전합니다. 부지런해라, 새로워져라, 꿈을 가지라고. 어머니 말씀은 그렇게 대를 이어가며 전해지겠지요 흐르는 강물처럼... 인생을 잠깐 살다가는 여름밤의 꿈이라지만, 유독 그리움만 겁을 넘습니다. 마치 태양이 헐었다는 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이 세상에서 생명력이 가장 길고 영원한 향기를 내는 것, 그리움이 아닐까요?. 사람은 그리움을 먹고 사는 영물입니다. 5월은 많은 생각을 부릅니다. 생각은 그리움을 키웁니다. 어머니는 내게 유독 많은 그리움을 남기셨습니다. 오늘도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그리움이 바람을 타고 산과 강을 건너 퍼집니다. 언젠가는 내가 좋아했던 공단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어머니가 저 하늘에서 내려올 것만 같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불효한 자식이 가장 서럽게 운다지요. 내가 그렇습니다. “서방님은 어머니한테 할 만큼 하셨어요. 우리가 못했지.” 형수님은 늘 그런 말을 해도 나는 잘못한 것만 생각납니다. 그런 일들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왜 그걸 못해드렸을까.” 아쉬움이 커지면 가슴이 시려옵니다. 떠나신 지 30년인데 지금도 어머니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짠합니다. TV에서 어머니 얘기를 듣다 눈시울이 붉어진 적도 많습니다. 지난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아내 바바라 여사(94)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유난히 숱이 많은 순백의 백발은 그녀만의 캐릭터였습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에 만평 한 컷이 실렸습니다. 그림판 하나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녀의 백발은 결코 화사하지 않은 슬픔이었기 때문이죠. 병을 앓던 어린 딸이 일찍 세상을 뜨자 백발로 변한 것입니다. 얼마나 슬픔이 컸으면, 딸이 그리웠으면, 그녀의 금발을 하루아침에 백발로 만들어버렸을까?.... 그림판은 백발의 여사가 흰 날개를 달고 천성 문을 향해 나르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어린 천사가 흰 날개를 퍼덕이며 그리운 어머니를 영접하러 나오는 장면입니다. 한 컷의 그림판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키는구나... 그리움이 슬픔이고 슬픔이 그리움이란 것을, 작가가 잘 포착해 낸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리운 날엔 한강에 나갑니다. 오늘같이 안개까지 내린 날이면, 강뚝에 앉아 딱히 정한 곳도 없이 강자락에 싸여 흘러온 세월을 돌아봅니다. 푸른 물 겹겹으로 가슴 휘두르며 나홀로 걸어가셨던 당신의 세상을 생각합니다. 강은 흐르다 돌에 부딪치고 바위에 깨져도 이내 한 물로 흘러갑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아픔이, 슬픔이 있었을까요.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넉넉한 품으로 안고 가셨습니다. 눈물을 삼키시면서... 그래서 물색이 저리도 검푸른가봅니다. 오늘도 새벽처럼 찾아오시는 어머니, 담장너머 아득한 안개 속으로 문풍지 같은 나의 떨림을 들으시나요? 당신의 자리는 억겁을 두고도 돌아오지 못할 흘러간 강물이신가요?.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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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 아빠가 미안하다, 널 몰랐구나
    며칠 전 전국 청소년 글짓기 심사를 끝내면서 갖는 유감입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받들어 유한재단이 해마다 5월이 되면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합니다. 올해로 28년째니 연륜이나 규모면에서 전국 규모로 열리는 대표적 청소년 백일장입니다. 올해는 천여 명의 청소년이 아카시아 향이 흩날리는 유한공고 교정에 모여 초?중?고별 글제에 따라 글 향기를 뽐냈습니다. 씁쓸한 것은 ‘내가 아버지라면’ 이란 글제를 놓고 중학생들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의식 때문입니다. 글제를 택할 때 10대의 자녀들이 평소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글을 통해 아버지 상(像)을 유추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지요. 글제를 내면서 ‘혹시나’ 했는데, 적지 않은 학생에게서 아버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지 못함을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은 아버지가 칭찬에 인색하다는데 불만이 컸습니다. “잘했네” “알았다” “수고했어.” 등과 같은 정감 없는 아버지의 말투에 아이들도 묻는 말에나 답하는 단답식 대화가 늘어남을 알 수 있었지요. 아버지의 칭찬이 있을 때도 그 뒤에 따라올 말에 신경을 쓴답니다. 때 아닌 칭찬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죠. “그래 그건 잘했어. 그런데 넌...” 한숨까지 섞인 조언을 듣노라면 작은 희망조차 웅크려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순수한 칭찬에 목말라합니다. 아버지의 특징으로 감정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무뚝뚝한 아버지, 어려운 아버지라고 쓴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원합니다.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아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빠를 기다립니다. “이리와 봐” 식의 부름보다 격려의 부름이, 사랑의 부름이었으면 한답니다. “넌 왜 엄마를 통해서 말하지?” 아버지의 불만도 이해는 되지만 사실 자초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평소 대화가 부족했다는 방증이지요. 아이들은 철부지가 아니었습니다. 속에 담아놓고 말을 안 할뿐,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분일뿐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날, 친구들과 나눈 에피소드입니다. 어버이 날이라고 아들이 전화를 했을 때, 예전에 우리는 첫마디를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나다. 기다려 엄마 바꿔줄게” 아들이 그게 아니고요 하면 “벌써 돈 떨어졌냐?” 그래도 아들이 용기를 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의 대답은 더 걸작입니다. “미친 놈, 뚱 단지 같긴!” 옛날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파안대소했습니다. 자식의 마음을 알면서도 멋대가리 없는 말을 했다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아들이 지금의 아빠들입니다. 대를 이어 배워온 언어의 관습이 그렇다면, 누구를 탓할 입장도 아니지요. 대화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끊기고 단절되기 싶습니다. 대화의 부족이나 불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서적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갈수록 멀어지는 아버지, 외톨이가 되는 아버지는 어쩌면 현대사회가 만든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피곤에 절어 밤늦게 퇴근하고 새벽처럼 나가는 아버지... 가뜩이나 어려워진 자영업자 아버지... 그 침통함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비춰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강한 이미지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크면서 아버지가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엄마가 자녀들과 대화를 독점하고 있을 때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고 합니다. “나 요즘 힘들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는 아버지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도 느껴졌답니다. 좋은 세상이 된 줄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란 존재가 외롭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 ‘아빠, 엄마‘ 로 부르며 성장기를 보내다가 때가 되면 ’아버지 어머니‘로 바꿔 부르기 시작합니다. 멀리 이스라엘에서도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 놀랐습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하다 정년퇴임하고 거창으로 내려간 친구 이재철 목사가 전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갔을 때, 누가 아빠하고 뒤에서 부르더랍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스라엘 아이가 자기의 아빠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뜻의 어휘지만 ’아빠‘와 ’아버지‘는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아빠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람어고, 아버지는 역어인 헬라어입니다. 아빠로 불리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한책임을 지지만,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은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 역할과 기능이 어휘에 담긴 거지요. 지금은 자녀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아빠의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헌신으로 아이들을 키우지만, 어느 날이 되면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합니다. 그 과정이 아름다우려면 아버지가 자녀들과의 대화에 새로운 눈을 떴으면 합니다. “아빠가 미안하다. 네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라는 생각으로.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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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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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실시간 기고 기사

  • 절제하는 삶을 위하여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온다' 했고, 동양선비들도 인간의 덕목중 절제만 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절제는 한 마디로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은 알아도 실천에서 어려움을 겪지요. 누구나 경험했을 일입니다. “새해는 꼭 해야지.” 다이어트, 금주, 금연 등 야심찬 결단을 하지만 얼마 안가 흐지부지 되죠. 습관 된 행동을 멈추고 나쁜 버릇을 고치는 일은 왜 늘 힘들까... 모순 속에 길을 찾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습관도 그중 하나죠.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적어도 만 번 이상의 훈련이 필요한데, 나쁜 습관은 한두 번으로도 족하다”고 해요. 손대면 헤어나기 어려운 도박과 같은 거죠. 지나친 걱정도 고약한 습관입니다. 걱정은 몸 안에서 번지는 불이죠. 밖에서 난 불은 소화기로 끄면 되지만 안에서 쥐고 흔드니 대처가 어려워요. 근심은 할수록 빠지는 늪입니다. 가려울 때 긁는 것처럼 당장은 잦아들지만 곧 더 가려워 집니다. 오죽하면 티베트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다”는 속담이 생겼을까요. 인간이 절제를 못하는 데는 진화론,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많은 요인이 혼재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란 말도 있어요.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과식본능이, 불필요한 물건을 계속 사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구매심리가, 알면서 계속 말실수를 함은 말로 관심을 끌려는 인간의 습성에 있답니다. 그렇다고 인간사회가 절제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요.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장식에서 벗어난 절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요. 샤넬의 패션은 여성에게서 허위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게 한 사고를 쳤지요. 절제는 언어는 물론 모든 생활에서 새로운 품격을 담아냅니다. 절제를 막는 것은 당장의 만족과 즐거움이 ‘참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게 유혹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스스로 욕망 조절을 못하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유익한 것, 해로운 것을 구분해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이끌어 주니까요. 사실 마음에서 분출되는 대부분은 절제의 대상입니다. 욕심과 허영, 미움, 시기, 질투까지도.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우유를 내고 뱀은 독을 내는 이치와 같아요. 사람이 입으로 먹을 때는 독이 없는데, 그것을 먹고 나오는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관계가 어질기를 원한다면, 절제의 힘에 도움을 청하세요. 절제는 좋은 습관을 부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는 데는 인류가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있어서죠.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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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좋은 생명체로 산다는 것
    반려동물 1000만 시대. 어딜 가도 동물과 만납니다. 사람들은 개에게 어떤 운동을 시켜야 할지, 고양이는 어떤 장난감을 주면 좋을까를 놓고 고민합니다. 사람이 동물에게 무엇을 배우고, 동물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걱정하는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가을볕이 좋아 공원 벤치에 앉았는데 주인을 따라 산책을 나온 시추 한 마리가 내 쪽으로 다가옵니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쓰다듬어주니 무릎까지 올라와 얼굴을 핥고 난리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좋았을 것을, 다음이 문제였죠. 시추를 데리고 가던 주인이 면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너 똥개야? 아무나 꼬리치면 어떡해?” 순간 무안해진 건 나였지요. 사람들은 애완견을 엄마, 아빠하며 끼고 살지만 실상 생명체를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와는 별개로 보입니다. 한 주인을 좇아야 혈통 있는 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위협적인 개를 은근히 자랑하기도 합니다. 심심찮게 애완견 때문에 다툼이 생깁니다. 왜 우리 쁘니만 야단치세요. 개라고 하셨는데 그럼 개조심 하시면 안 되나요?“ 듣자하니 내 새끼를 개라고 폄하한 댁이 비켜서 가라는 말로 들립니다. 개를 놓고 싸운다는 게 볼썽사나운지 됐다며 자리를 피하네요. 해외에서는 이런 개를 사회성이 부족한 문제 견으로 봅니다. 낯선 사람이라고 다 도둑은 아니니까요. 명견 진돗개가 세계애견협회에 정식 품종으로 등재되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 주인에만 충성도가 강해서죠. 진돗개가 군견으로 적합하지 못한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인이 자주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거지요. 사람도 어린 시절의 경험과 교육이 평생에 작용하듯 개의 사회성도 생후 3-12주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때 다양한 환경과 사람을 접하지 못하면 훗날 낯선 사람이나 상황 앞에 쉽게 겁을 먹고 짖거나 공격성을 띈다고 해요. 최근 야생동물이 잇단 변을 당하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습니다. 주택가에 나타난 맷돼지가 사살, 포획, 도주하는 소동을 벌이더니, 다음날 밤은 고속도로를 걷던 맷돼지 10마리가 모두 차에 쳐 죽었습니다. 이들은 왜 나타났을까요? 지난 주, 서초구 서리풀공원에 올랐다가 여기저기 토끼가 뛰노는 진 풍경과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봐도 경계하지 않는 걸 보면 이러한 환경에 익숙해져 보입니다. 그러다 서초구청이 내건 안내문을 읽고서 사연을 알았지요. ‘제발 토끼를 버리지 마세요” 일종의 호소문입니다. 애완동물 1000만 시대의 그늘입니다. 언제라도 싫증나면 버려지는 개, 고양이, 열대어, 토끼 등. 곳곳에 버려진 생명들의 신음에는 무관심합니다. 곧 겨울이 올 텐데 토끼는 모진 추위를 어떻게 견딜까? 그러면서 엉뚱한 생각이 도집니다. 이판에 전쟁이 난다면 거리마다 버려진 애완동물로 홍수가 나겠구나. 유전자 관점에서 보면 모든 생물은 연결돼 있습니다. 서로 돕고 공생해야 그나마 생태계가 유지될 텐데, 지금 인간이 자행하는 이 어마한 환경파괴, 생명파괴는 궁극에 내 가족을 사지로 모는 일입니다. 생명체 최상부 고리의 사람이라면, 이제라도 좋은 생명체로 살아야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앞으로 처음 본 개가 꼬리를 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잘 키우셨네요. 교육이 훌륭하신가 봐요.” 이렇게 칭찬하면 어떨까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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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 나의 무서운 상전이 된 몸
    어디선가 보았던 글입니다. “젊었을 때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한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 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 젊어서야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준 몸인데, 지금은 몸이 내 생명줄을 바싹 쥐고 있습니다. 몸이 상전이 된 데는 세월 탓이 여덟이고, 나머지는 몸을 마구 굴린 내 잘못입니다. 우리나라 기대수명은 82.6세로 일본에 불과 1.5년 차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건강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10명당 3명꼴에 불과합니다. 그 대신 외래진료건수는 세계 최고지요. 우리처럼 종합건강검진이 번창한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덕분에 병을 조기에 발견도 하지만 건강에 대한 걱정을 과잉생산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수년 전 파이낸셜 타임스가 한국인의 장수비결을 ‘김치와 건강 염려’라고 빗대고는 마음 편히 사는 것보다 좋은 건강비결이 있겠느냐고 되묻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의학정보의 홍수 속에 삽니다. 웬만큼 나이가 든 사람은 만나면 건강문제가 대화의 중심이 되는 현실입니다. 하버드의대 연구팀이 60년에 걸쳐 3백명을 대상으로 ‘잘 늙기’를 추적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노화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와 원만한 인간관계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해 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눈이 어둡고 몸이 굳어 발톱 깎는 일조차 전쟁이라며 씁쓸해 하지만, 생로병사를 순리로 받아들임이 첫 번째 건강의 비결입니다. '나무는 뿌리가 먼저 늙고, 사람은 다리부터 쇠한다’ 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대뇌에서 다리로 보내는 명령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고, 속도도 떨어집니다. 진시황 이후 청나라 마지막 황제까지 335명 황제의 평균수명이 41세이고, 조선시대 27명 왕의 평균은 37세에 그칩니다. 그래서 예부터 장수의 조건으로 보약이나 산해진미보다 튼튼한 다리를 꼽았지요. 다리는 기계의 엔진 같아 망가지면 올 스톱입니다.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피부가 주글주글해짐을 걱정할 게 아니라, 다리 근육부터 신경 쓰랍니다. 몸에서 가장 큰 관절과 뼈는 다리에 다 모여 있어요. 젊은이의 대퇴골은 승용차 한 대 무게를 견뎌내고 슬개골은 몸무게의 9배를 지탱합니다. 대퇴부와 종아리 근육은 땅의 인력과 맞서느라 늘 긴장상태에 있고요. 견실한 골격과 강인한 근육, 부드럽고 매끄러운 관절은 인체의 철의 삼각을 만들어 하중을 지탱합니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prevention(예방)’ 지가 장수의 특징으로 다리근육의 힘을 꼽는 이유입니다. 얼굴에는 그 사람의 일생이 담겨 있습니다. 화장을 해도 숨은 얼굴에서 나오는 잔상은 가릴 수 없지요. 젊어 사랑했던 여인을 만나고 온 친구가 만나지 않음만 못하다고 쓸쓸해 합니다. 고이 간직해온 환상이 무너져 아쉽다면서. 나이가 들어도 여자의 얼굴에서 젊은 시절의 모습이 보여야 아름답고, 남자는 경륜과 인품이 풍겨나야 잘 늙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는 어떤 생각과 태도로 삶을 살았느냐, 살아갈 것이냐 와도 통합니다. 철따라 옷을 갈아입듯, 노화에 순응하고 원만한 인간관계와 다리 근육까지 잃지 않으면 상전이 된 몸과 더없이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겠지요. 금이라서 다 반짝이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스스로 생각과 태도를 잘 가꾸면 녹이 내리지 않고, 나이테만큼 깊게 내린 뿌리에는 쉽게 서리가 닿지 못하니까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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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7
  • 삶은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
    70대에 읽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젊어서 읽던 때와는 또 다른 잔잔한 공명을 주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오디세이아’의 테마는 ‘귀향’. 그리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고향을 찾아가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귀향 과정을 이야기한 대서사이다. 그 과정에서 바다와 섬, 그 밖의 여러 곳에서 고난을 겪으며 고향을 찾기까지의 분투와 아픔을 그렸다. 그의 귀향 여정은 세월이란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형극의 여정 끝에 고향을 찾는 것으로 시련이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디세우스가 살인적인 재앙을 헤치고 귀향에 성공하더라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 그동안 집안이 망해 버렸거나 아내가 정절을 버렸다면, 그의 귀향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케네 왕 아가멤논이 집에 무사히 돌아온 줄 알고 안심하다가 아내와 간부에 의해 살해를 당한 것처럼, 한 순간도 안도할 수 없는 게 인생이고 삶이기에. 오디세우스는 전쟁 영웅답게 신4중했다.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에 도착한 그는 일단 거지로 변장하고 가족들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남편 부재의 20년 세월을 아내 페넬로페는 어떤 심정으로 살았는지, 은밀하게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페넬로페의 베 짜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쉴 새 없이 일을 해도 끝나지 않는다는... 가장이 집을 비운 사이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녀는 남편 없는 긴 세월을 숱한 유혹과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의 미모에 반해 구혼을 청하는 남자들로 편할 날이 없었으니까. 오디세우스는 출정에 나서면서 아내에게 10년을 약속했다. “만일 10년 안에 돌아오지 못하면 당신은 재혼을 하시오”라고. 오디세이아에는 페넬로페 이야기처럼 흥미로운 소설적 장치가 여럿 있다. 그녀는 정숙한 여인이었다. 구혼자들이 몰려와 반협박조의 청혼을 할 때마다 이를 지혜롭게 물릴 줄 아는 여자였다. “지금 시아버지에게 바칠 옷을 짜고 있으니,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며, 에둘러 남자들을 진정시킨 것이다. 베틀에 실을 올리면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니, 욕망에 달뜬 남자인들 어쩌겠나. 낮에는 옷을 짜고 밤에는 풀고, 하루하루 같은 수고를 반복하면서 페넬로페는 오매불망 남편의 귀향을 기다렸다. 남편이 약조한 1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실타래와 베틀에 자신을 동여매고 자신의 정절을 지킨 셈이다. 오디세우스가 전편에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 귀향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그 과정이 삶이라는 것. 집에 돌아오려면 먼저 집을 떠나야 하듯 귀향은 출향이 전제돼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집을 떠난 것은 밖에서 끌어낸 힘도 있지만, 밖으로 나가려는 내면의 원심력도 작용했다. 오디세우스의 투혼은 유혹의 노래를 부르는 세이레네의 섬들을 통과할 때 잘 드러났다. 부하들은 유혹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밀랍으로 막았으나, 오디세우스는 노래는 들으면서 그 유혹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어놓았다. 인간을 바깥세상으로 끌어내려는 호기심은 위험한 것이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억누르면 자폐증이 되고, 그렇다고 생각 없이 호기심을 좇다가는 ‘파멸’을 부를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도 파멸에 이르지 않는 절묘한 선택을 배합한 셈이다. 인생은 늘 원심력과 구심력의 작용과 반작용이 상충하는 삶이다. ‘귀향’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원심력만 작용하면 인간은 결국 자아 상실의 상태로 빠지게 됨을 경고하는 것일까? 인간이 당면한 환경 문제와 물질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간이 아무리 신적 앎에 다가선다 해도 우리 자신은 신과는 다른 인간임을 재확인하는 지혜를 잃지 말라”는 경고로도 읽힌다. 오디세이아는 신화적 요소에 이야기를 버무려 고전 특유의 매력을 담아냈다. 특이한 문체,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현들이 곳곳에 매력 포인트를 숨기고 있다. 페넬로페에게 몰려오는 구혼자들 행태, 20년 정절을 지키는 페넬로페의 눈물, 오디세우스의 귀향과 상봉담(談), 그리고 아내를 넘본 자들을 응징하는 복수담까지…. 춘향전의 백미인 이도령과 춘향의 상봉 같은 극적인 장치도 멋스럽다. 숱한 남자로부터 유혹에 시달려온 페넬로페는 남편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쩍 떠본다. “그 침대를 이쪽으로 옮겨놔 주시겠어요?”라고…. 그러자 오디세우스가 답했다. “그 침대는 옮길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알지 않소?” 오디세우스가 직접 산 나무의 밑동을 잘라 만들었으므로, 땅 속에 뿌리가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진짜 남편 오디세우슥가 돌아왔음을 확증하고 감격적인 부부 상봉이 이루어진다. “드라마처럼 재밌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한 번 읽어봐. 남는 게 있을 거야.” 학창 시절, 나의 손에 오디세이아를 건네주며 일독을 권하던 선배. 그는 지금 이 세상을 떠나 본향집을 찾아가고 있다. 그길 만은 험난하지 않기를... 선배의 따뜻한 미소가 눈가에 맴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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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어머니의 강(江)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 항상 봄처럼 새로워져라.... 그때는 그 말의 속내가 무엇인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불혹이 넘어서 비로소 그 말에 눈을 떴습니다.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혼신을 다해 생명을 탈환하는 노력을 보고, 어린 자녀들에게 ‘부지런해라‘고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을 깨달으며,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고 당부했습니다. 화단의 나무에서, 연못과 들에서 움트는 대지의 새눈들이 경이로워 딸아 너도 저렇게 새로워져라고 일렀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여기 서 있는데 왔다간 건 그들입니다. 이젠 아들이 손자에게 같은 말을 전합니다. 부지런해라, 새로워져라, 꿈을 가지라고. 어머니 말씀은 그렇게 대를 이어가며 전해지겠지요 흐르는 강물처럼... 인생을 잠깐 살다가는 여름밤의 꿈이라지만, 유독 그리움만 겁을 넘습니다. 마치 태양이 헐었다는 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이 세상에서 생명력이 가장 길고 영원한 향기를 내는 것, 그리움이 아닐까요?. 사람은 그리움을 먹고 사는 영물입니다. 5월은 많은 생각을 부릅니다. 생각은 그리움을 키웁니다. 어머니는 내게 유독 많은 그리움을 남기셨습니다. 오늘도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그리움이 바람을 타고 산과 강을 건너 퍼집니다. 언젠가는 내가 좋아했던 공단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어머니가 저 하늘에서 내려올 것만 같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불효한 자식이 가장 서럽게 운다지요. 내가 그렇습니다. “서방님은 어머니한테 할 만큼 하셨어요. 우리가 못했지.” 형수님은 늘 그런 말을 해도 나는 잘못한 것만 생각납니다. 그런 일들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왜 그걸 못해드렸을까.” 아쉬움이 커지면 가슴이 시려옵니다. 떠나신 지 30년인데 지금도 어머니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짠합니다. TV에서 어머니 얘기를 듣다 눈시울이 붉어진 적도 많습니다. 지난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아내 바바라 여사(94)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유난히 숱이 많은 순백의 백발은 그녀만의 캐릭터였습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에 만평 한 컷이 실렸습니다. 그림판 하나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녀의 백발은 결코 화사하지 않은 슬픔이었기 때문이죠. 병을 앓던 어린 딸이 일찍 세상을 뜨자 백발로 변한 것입니다. 얼마나 슬픔이 컸으면, 딸이 그리웠으면, 그녀의 금발을 하루아침에 백발로 만들어버렸을까?.... 그림판은 백발의 여사가 흰 날개를 달고 천성 문을 향해 나르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어린 천사가 흰 날개를 퍼덕이며 그리운 어머니를 영접하러 나오는 장면입니다. 한 컷의 그림판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키는구나... 그리움이 슬픔이고 슬픔이 그리움이란 것을, 작가가 잘 포착해 낸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리운 날엔 한강에 나갑니다. 오늘같이 안개까지 내린 날이면, 강뚝에 앉아 딱히 정한 곳도 없이 강자락에 싸여 흘러온 세월을 돌아봅니다. 푸른 물 겹겹으로 가슴 휘두르며 나홀로 걸어가셨던 당신의 세상을 생각합니다. 강은 흐르다 돌에 부딪치고 바위에 깨져도 이내 한 물로 흘러갑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아픔이, 슬픔이 있었을까요.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넉넉한 품으로 안고 가셨습니다. 눈물을 삼키시면서... 그래서 물색이 저리도 검푸른가봅니다. 오늘도 새벽처럼 찾아오시는 어머니, 담장너머 아득한 안개 속으로 문풍지 같은 나의 떨림을 들으시나요? 당신의 자리는 억겁을 두고도 돌아오지 못할 흘러간 강물이신가요?.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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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 아빠가 미안하다, 널 몰랐구나
    며칠 전 전국 청소년 글짓기 심사를 끝내면서 갖는 유감입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받들어 유한재단이 해마다 5월이 되면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합니다. 올해로 28년째니 연륜이나 규모면에서 전국 규모로 열리는 대표적 청소년 백일장입니다. 올해는 천여 명의 청소년이 아카시아 향이 흩날리는 유한공고 교정에 모여 초?중?고별 글제에 따라 글 향기를 뽐냈습니다. 씁쓸한 것은 ‘내가 아버지라면’ 이란 글제를 놓고 중학생들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의식 때문입니다. 글제를 택할 때 10대의 자녀들이 평소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글을 통해 아버지 상(像)을 유추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지요. 글제를 내면서 ‘혹시나’ 했는데, 적지 않은 학생에게서 아버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지 못함을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은 아버지가 칭찬에 인색하다는데 불만이 컸습니다. “잘했네” “알았다” “수고했어.” 등과 같은 정감 없는 아버지의 말투에 아이들도 묻는 말에나 답하는 단답식 대화가 늘어남을 알 수 있었지요. 아버지의 칭찬이 있을 때도 그 뒤에 따라올 말에 신경을 쓴답니다. 때 아닌 칭찬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죠. “그래 그건 잘했어. 그런데 넌...” 한숨까지 섞인 조언을 듣노라면 작은 희망조차 웅크려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순수한 칭찬에 목말라합니다. 아버지의 특징으로 감정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무뚝뚝한 아버지, 어려운 아버지라고 쓴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원합니다.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아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빠를 기다립니다. “이리와 봐” 식의 부름보다 격려의 부름이, 사랑의 부름이었으면 한답니다. “넌 왜 엄마를 통해서 말하지?” 아버지의 불만도 이해는 되지만 사실 자초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평소 대화가 부족했다는 방증이지요. 아이들은 철부지가 아니었습니다. 속에 담아놓고 말을 안 할뿐,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분일뿐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날, 친구들과 나눈 에피소드입니다. 어버이 날이라고 아들이 전화를 했을 때, 예전에 우리는 첫마디를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나다. 기다려 엄마 바꿔줄게” 아들이 그게 아니고요 하면 “벌써 돈 떨어졌냐?” 그래도 아들이 용기를 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의 대답은 더 걸작입니다. “미친 놈, 뚱 단지 같긴!” 옛날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파안대소했습니다. 자식의 마음을 알면서도 멋대가리 없는 말을 했다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아들이 지금의 아빠들입니다. 대를 이어 배워온 언어의 관습이 그렇다면, 누구를 탓할 입장도 아니지요. 대화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끊기고 단절되기 싶습니다. 대화의 부족이나 불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서적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갈수록 멀어지는 아버지, 외톨이가 되는 아버지는 어쩌면 현대사회가 만든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피곤에 절어 밤늦게 퇴근하고 새벽처럼 나가는 아버지... 가뜩이나 어려워진 자영업자 아버지... 그 침통함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비춰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강한 이미지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크면서 아버지가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엄마가 자녀들과 대화를 독점하고 있을 때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고 합니다. “나 요즘 힘들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는 아버지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도 느껴졌답니다. 좋은 세상이 된 줄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란 존재가 외롭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 ‘아빠, 엄마‘ 로 부르며 성장기를 보내다가 때가 되면 ’아버지 어머니‘로 바꿔 부르기 시작합니다. 멀리 이스라엘에서도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 놀랐습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하다 정년퇴임하고 거창으로 내려간 친구 이재철 목사가 전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갔을 때, 누가 아빠하고 뒤에서 부르더랍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스라엘 아이가 자기의 아빠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뜻의 어휘지만 ’아빠‘와 ’아버지‘는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아빠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람어고, 아버지는 역어인 헬라어입니다. 아빠로 불리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한책임을 지지만,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은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 역할과 기능이 어휘에 담긴 거지요. 지금은 자녀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아빠의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헌신으로 아이들을 키우지만, 어느 날이 되면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합니다. 그 과정이 아름다우려면 아버지가 자녀들과의 대화에 새로운 눈을 떴으면 합니다. “아빠가 미안하다. 네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라는 생각으로.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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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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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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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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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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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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